내가 싫증이 쉽고 포기가 쉬웠던 이유는 그만큼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 아닐까.

어쩌면 나는 처음부터 어중간한 아이는 아니었을지 모른다. 그저 내가 나를 어중간하게 만들어버린 걸지도. [싫증이 쉬운 아이. 17p]

 

 

 

처음 자취를 시작했을 때 무엇보다 가장 신났던 건 내가 원할 때 원하는 장소에서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는 것.

아무거나 해도 된다는 것이였다. 이것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구나 싶었던 자취 초보생 시절.

그런데 언젠가 꽤 오래 혼자 자취를 한 선배 집에 갑자기 들를 일이 있었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퍼지는 스테이크 냄새.

"선배는 혼자 스테이크도 해 먹어요?" 선배는 그냥 웃었다. 그런데 미니오븐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는 스테이크.

"너 먹고 싶으면 먹을래? 한 지 좀 되서 다시 데워야하긴 하지만."

좀 의아했다. 이렇게 먹음직스런 냄새를 풍기는 스테이크를 지금까지 왜 안먹고 놔뒀는지.

"그냥 갑자기 먹기 싫어져서."  그땐 그 선배가 참 이해가 안 됐는데 애써 만들어 놓은 스테이크를 왜 몇시간이나 방치해둔 건지

도무지 이해가 안됐는데. 어젯밤이었다.

"이 시간에 무슨 치킨이야? 자꾸 야식을 먹어대니까 속이 안 좋지." 이런 잔소리는 존재하지 않는 나의 자취방.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그냥 치킨을 시켰다. 그리고 방 안 가득 퍼지는 치킨 냄새에 흐뭇해하며 맥주캔을 똑 하고 따는 순간,

기분이 묘했다. 기분이 좋은 건지 아닌 건지 나도 잘 모르겠는, 아니 어쩌면 두가지 다 아닌 듯한 묘한 느낌.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든 거다.

무엇이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 그건 자유로운 걸까, 외로운 걸까? [자유로운 걸까, 외로운 걸까? 47p]

 

 

"그것 봐, 인생은 타이밍이라니까!"

사랑을 시작할 때도 이별을 말할 때도 새로운 일을 시작해보려 할 때도.

심지어 누군가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할 때도 타이밍을 생각해야 하다니. 그래서 우리는 늘 피곤한가 보다.

내가 하고 싶은 말, 내가 저지르고 싶은 일들을 이것저것 생각 안하고 확 저질러버릴 수가 없어서.

언제나 그 '적당한 타이밍'이란 녀석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해서.

그런데 정말 그 '적당한 타이밍' 이라는 게 있긴 하는 걸까. [적당한 타이밍. 61p]

 

 

많은 사람들이 말렸던 일을 덜컥 저지르고만 친구가 있다.

그 친구의 블로그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다. '언제까지 상상만 하고 있을 순 없지 않은가.'

내가 해봐야 하는 거다. 혹여 나중에 "거봐, 내가 뭐랬니?" 이런 이야기를 듣게 된다 할지라도

정말 언제까지나 상상만 하고 있을 순 없는 일이니까. [엄마 마음. 93p]

 

 

"나 이렇게 살다 죽을까봐 두려워." 친구는 말했다.

그날 또한 평소와 다름없이 사무실에서 헉헉대며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선배를 보니 5년 후 나는 저렇게 살고 있을까?

건너편 과장님을 보니 10년 후 나는 저렇게 살고 있을까?

저 멀리 부장님을 보니 20년 후 나는 저렇게 살고 있을까? 갑지기 두려웠단다.

"그냥 그냥 이렇게 살다 죽는 건 아닌가 두려웠어. 그럼 너무 억울할 것 같아서." [세계여행. 113p]

 

 

남들은 다 뭐라도 하고 있는 것 같고 남들은 다 뭐라도 배우고 있는 것 같고

남들은 다 미래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고 그래서 가만히 서 있는 나는 마냥 뒤처지고 있다는 느낌.

사실은 그것도 힘든건데. 제자리에 서 있는 것도, 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지금 이 순간을 제대로 즐기며 사는 것도, 사실은 참 힘든 건데.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131p]

 

 

어떤 선택을 해도 후회는 남을 테고 이렇게 고민하면서 시간만 끄는 것보단

뭐든 빨리 결정해서 시작하는 게 나을 테니까.

그래야 그 길이 아니다 싶으면 다시 돌아 나올 여유도 생길 테고. [동전던지기. 141p]

 

 

실망하면 어떻하지. 상처받으면 어떻하지. 실패하면 어떻하지. 그렇게 주저주저.

여러번의 실망. 여러번의 상처. 여러번의 실패.

그 사이 어느덧 나는 겁쟁이로 변해 있었다.

설렘보단, 두근거림보단, 언제나 걱정이 앞서는 겁쟁이로. [실망하면 어떻하지. 143p]

 

 

스무살, 딱 그나이에만 할 수 있는 사랑

스무살, 딱 그 나이에만 꿀 수 있는 꿈.

나는 그런 사랑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꿈을 꾸고 있었다. 내 나이 스무살 때.

내가 그리웠던 것은 그 사람이 아니었던 거다. 그 사람을 사랑했던 나.

스무살의 꿈을 꾸던, 스무살의 내 자신이었을 뿐. [스무살, 딱 그 나이에만. 171p]

 

 

참 이상하다. 누군가를 처음 만났을 땐 상대를 알아가는 일이, 그리고 상대에게 나를 알려가는 일이 참 재미있다.

서로의 이름부터 생일, 성격, 식성, 취미,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

긴장하면 눈을 자주 깜빡인다든가 거짓말할 땐 고개가 약간 오른쪽으로 기운다 등의 내 작은 습관이나

지나치듯 했던 내 말을 상대가 기억해주면 점점 더 즐거워진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정보에 대한 공유는 즐거움이 아닌 당연한 것, 혹은 의무로 변해버려서

'왜 내 마음을 몰라주지? 왜 나를 이해 못 해주지? 왜 그거 하나 기억 못 해주는 거냐고!'

상대에게 화가 나거나 짜증내는 일이 잦아진다.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가 이렇게 오래 알아왔는데.'

그런 이유로 날 이해 못 해주는 상대가 답답하다 말하면서도

그렇게 오래 알아온 상대를 내가 이해해주자는 생각은 왜 못 하는 건지. [우리가 이렇게 오래 알아왔는데. 185p]

 

 

 

다른 사람들의 걱정 어린 시선.

다른 사람들의 듣기 싫은 한마디를 흘려들을 수 없는 건,

웃어넘길 수 없는 건, 결국 그런 거다.

자격지심.

나 자신도 나를,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격지심. 271p] 

 

 

 

 


너무나도 흔한 이야기이다. 내친구의 이야기. 어느 선배의 이야기. 동생의 이야기. 그 시절 그 남자의 이야기.

그리고 가장 숨기고 싶은 나의 이야기. 2년전 서른의 나이에 읽으며, 지금의 나를 말해주는 책이라고 메모까지 남겨놨지만

지금 다시 읽어보아도 또 여전히 이곳저곳에 나의 모습이 담겨져 있다.

그렇게 어른이 되기에는. 아직은 더, 꿈꾸고 싶은 나. 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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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는 우연히 스쳐 지나간 적이 있을 거라는 사실이 가슴을 설레게 했었다.

그런데 헤어지고 난 후에는, 우연히 스쳐 지나갔다는 사실이 가슴을 무너지게 했다.

영원히 머물줄 알았던 사랑이, 또다시 스쳐 지나가는 존재가 되어 버릴 수도 있다는 것.

내가 세상에서 배운 가장 슬픈 사실이다. [어떻게 만났는데 이렇게 잃어버리는 거니]

 

 

그녀가 말했다. "쿨하다는 건 모든 것으로부터 일부러 거리를 두는거지. 새한테 먹힐까봐, 커다란 소라껍질을 쓰고있는 게처럼"

[마음의 온도]

 

 

우리는 작고 연략하고 불안하기 짝이 없지만 어떤순간에는 크고 강하고 담대해진다.

사람들은 강하다.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우린 모두 괜찮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밥을 먹기 위해 시내를 헤매고 있다. 우선 해결해야 할 것은 배고픔이니까.

하지만 배불리 먹고 나면 또 다른 걸 원하게 되지 않을까.

"지금은 나한테 월남쌈이 가장 중요해. 언제나 현재만 생각하려고 하거든. 지금 내게 가장 필요한 것만 생각하려고.

너무 멀리 생각하면, 현재를 즐길 수 없잖아." 라고 말했다.

절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평선을 쳐다보고, 즐겁게 지내기 위해서는 발밑을 쳐다본다. [지평선을 볼 때와 발밑을 볼때]

 

 

"네가 그리워하는게 무엇인지 알아? 내가 보기엔 그건 그냥 외로움이야"

무언가 막연히, 하지만 못 견디게 그리워질 때, 외로움이 그대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 [외로움이 말을 걸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엄마와 난 똑같은 사람을 그리워 하고 있지만,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다.

그것은 그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희석시키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하는 순간, 그리움은 조금씩 증발한다. [증발]

 

 

매일의 삶은 내면의 보석을 발굴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자기만의 색깔로 빛난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보석을 품고 있는 거대한 별이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과 함께하는 따뜻한 식사 한 끼. 반년 만에 들른 홈페이지에서 발견한 옛 친구의 안부 쪽지.

피로에 지친 하루를 마치고 자리에 누워 이불을 잡아당길 때의 느낌.

새로 산 신발이 발을 편하게 만들어 줄 때의 안도감. 유난히 노을이 아름다운 저녁.

항상 그 시간, 그 자리에 있어 주는 라디오.

이런 목록들을 만들고 나니 우리의 24시간은 행복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행복은 발견하는 자의 몫이 된다.

 

 

 

 

이런류의 에세이를 좋아해서 종종 사보고 다시 중고서적으로 되팔고는 하는데.

그 중 마음에 들어 소장할 정도의 가치를 지닌 에세이가 나타나면 줄을 긋고 본다.

그 줄긋기의 의미는 내 감성을. 내 기억을. 내 마음을 콕 하고 찌르는 타이밍.

이책을 읽다보면 상처받고 외롭던 젊은 날의 나와 닮아 있어 서글픈 웃음이 피식피식 난다.

나뿐만 아닌. 어디로 어떻게 가야할지 몰랐던 젊은 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만한 글들이 가득 담겨있다.

라디오 작가의 감성이 녹아 있어서인지. 모든 챕터의 글들이 깊은 밤 라디오에서 흐르는 사연같고. 내 이야기 같은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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